궁금한 북한의 이모저모

평양의 도시 건설 역사‘문명국가 건설’ 표방하며
대대적인 도시재생사업 추진 중
남과 북이 머리 맞대면 시행착오 줄일 수 있다

정창현
머니투데이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2002년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 평양의 거리는 회색빛 건물들과 붉은색 거리 구호판 일색의 잿빛 색채만큼이나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경제난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주요 거리의 건물과 아파트들은 대부분 1970-80년대에 지어져 노후화 된 상태 였다. 그러나 다음 해 평양역에서 평양대극장에 이르는 영광거리 주변 아파트 26개 동과 공공건물들의 보수, 도로 재포장 공사 완료를 시작으로 북한식 도시 재생 사업이 시작됐다. 그 후 평양을 방문할 때면 항상 거리마다 공사현장을 손쉽게 목격할 수 있을 정도로, “평양은 건설 중”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외관상으로도 건물의 외벽에 새로 타일을 붙이거나 살구·민트·연보라·청록의 파스텔 톤 빛깔로 단장됐다. 그리고 인민대학습당, 주체사상탑 등 평양의 랜드 마크와 주요 거리에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원근거리 시점을 설정하고 여기에 맞게 조명이 설치됐다. 북한에서는 ‘도시불장식’이라고 한다. 이 시점부터 도시를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수단으로 ‘색’과 ‘빛’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김정은시대에 들어와서는 ‘색발전의 새로운 전성기’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평양서 만난 북한의 관리들은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재건설사업계획이 수립됐고, 이 계획에 따라 단계별로 건설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시점부터 북한 정권이 들어선 후 평양의 3번째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고, 이러한 흐름이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대대적인 ‘건설붐’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6세기 장안성
(후기 평양성)
축성으로 시작된
계획도시 평양

평양은 1,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계획도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평양지역은 단군왕검 때부터 고조선의 중심지 였지만 현재의 평양 중심부가 도시로 본격 개발된 것은 고구려 평원왕 때 장안성(후기 평양성) 천도를 기점으로 볼 수 있다. 장수왕 때 대성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552년부터 586년 사이에 새 수도로 평양성을 계획해 건설했다.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등 3대에 걸친, 30년이 넘는 대역사(大役事)였다. 모란봉, 보통강, 대동강을 끼고 건설된 평양성의 둘레는 약 16km, 성벽의 총 연장길이는 23km, 총 면적은 11.85k㎡에 달했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둘레가 18.6km이니 대략 비슷한 규모인 셈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 주변지역을 포함한 수도의 집 수는 21만호를 넘었다. 평양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서경(고려), 평안남도 감영(조선시대)의 소재지로 중요시돼, 계속 개축되고 보수돼 대한제국 시기까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됐다. 평양성의 중성, 외성 구역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시가지로 사용됐기 때문에 성벽이 많이 훼손됐지만, 그래도 20세기 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성도를 보면 평양성의 북성과 내성, 중성의 외곽 성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림 1.] 20세기 초에 그린 평양성도.
6세기 고구려의 수도성으로 건설된 이후로 1,300여 년 동안 번성한 평양성의 전경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6세기 말-17세기 중반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성도(뉴욕공립도서관 소장)를 보면 평양은 잘 구획된 계획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대다수 주택은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변모했다. 16세기에 화재 예방을 위해 관청에서 “기와를 구워 싸게 쌀자” 여염집까지 초가가 사라지고 시가지가 기와집으로 외관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일제강점이 되면서 평양은 전통과 단절된 채 식민지 근대도시로 변모가 이뤄졌다. 대동강에 대동교가 세워지고, 평양성의 내성과 외성을 잇는 중심도로에 일본인 중심의 야마토마치(大和町) 거리를 비롯해 일제 통치기구 건물들이 속속 건설되면서 ‘역사도시 평양’은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또한 1920년대에 평양에 전차선이 부설되면서 평양성의 성벽들이 허물어졌고, 고구려 때 지워진 영명사 안에는 차집(요정)이 들어섰다. 더구나 그나마 남아 있던 평양성의 성곽, 관청건물을 비롯해 조선시대의 기와집들이 6.25전쟁 시기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1952년 10월, 평양은 이미 더 이상 폭격의 대상물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폐허가 돼버렸다.

사회주의
계획도시로
전후에 복구

당연히 전쟁이 끝난 후에는 파괴된 시설(주택, 공장, 인프라 등)의 복구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1951년 모스크바에 유학 중이던 건축가 김정희가 잠시 귀국해 ‘평양특별시 개건종합계획략도’(1951.5.20.)를 초안했고, 이를 기초로 수정을 거쳐 1952년 ‘평양시 총계획략도’가 완성됐다. 이 계획도 작성에는 당시 북한 건축계의 최고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로식, 강처한, 리형, 신순경 등이 참여했다. 이 계획도는 전쟁이 끝난 후 ‘평양시 제1차 복구 중심부 총계획’, ‘평양시 총계획도’ 등으로 수정, 보완돼 실제 평양 재건설의 밑그림이 됐다. 대체로 평양역에서 모란봉에 이르는 축을 중심으로 도로와 광장, 주요 건물, 살림집과 상가가 배치되는 구상이었다.

소련 유학파인 김정희를 비롯한 북한 건축가들과 소련 건축가들은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바르샤바의 도시재건 경험을 참고로 평양의 도시재건계획을 수립했다. 전후 평양재건계획에 소련의 경험과 건축가들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당시 내각 건설성의 주요 간부도 김승화, 박의완 등 ‘소련파’가 맡고 있었다. 김정희는 1955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쏘련 인민들은 우리에게 건설 기계, 건설 자료를 주었으며 훌륭한 설계 도면들을 제공하여 주었으며, 쏘련 기술자들은 벌써 전쟁 기간부터 우리 건축가 및 건설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거의 모든 중요한 설계들에 쏘련 전문가들의 의견이 포함되여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평양시 총계획도 작성에 있어서 그들은 직접 꼰술따찌야(자문)를 우리들에게 주었으며, 중요한 대상을 설계와 건설 행정에서는 그들의 의견이 례외없이 참고되였다.”(김정희, 「해방된 조선 인민의 도시 건설」, 「건축과 건설」 1955년 1호, 11쪽)

[그림 2.] 평양역에서 바라다 본 1950년대에 새로 건설된 인민군거리 (오른쪽. 현재 영광거리)와 현재 창광거리 모습 (1960년 촬영)

전후복구 3개년(1954-1956년) 동안 제일 먼저 광장과 주요 간선도로가 건설됐다. 특히 1953년 8.15열병식에 맞춰 평양 중심부의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김일성광장이 조성됐고, 동서 방향의 ‘쓰탈린거리(현재 승리거리)’와 ‘인민군거리(현재 영광 거리)’를 축으로 가로축이 구획되었다. 이어서 1차 5개년계획기간(1957-1961년)에는 새롭게 청년거리, 칠성문거리, 개선문 거리, 모란봉거리, 봉화거리 등이 만들어지면서 현재 평양의 기본 골격이 갖춰졌고, 이후 창광산을 우회하는 창광거리와 천리마 거리가 조성됐다.

전후에 처음 평양에 지어진 대표적인 ‘고층공동살림집’(아파트)인 ‘평양노동자아빠트’(1954)는 당시 소련에서 지어지던 외관과 함께 라디에이터나 벽난로 난방 방식이 도입됐다. 당시 건설된 살림집은 조립식 표준 설계로 동일 베이(bay)에 맞추어 침실, 부엌, 화장실 등을 배치했고, 거실은 없었다. 서구의 표준화된 평면을 도입하여 건설된 북한 공동살림집은 대체로 면적이 작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많은 면적을 제공할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사회주의권의 평면은 원칙적으로 개인 및 가족에게 최소의 공간을 제공하고 사회 및 공동생활을 강조한 흐름에 부합한다.

그러나 라디에이터 난방 방식에 대해 평양 시민들의 불만이 쏟아지면서 살림집에 다시 온돌이 도입됐다. 1958년 이른바 ‘8월전원회의사건’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면서 이러한 흐름은 확대되었고, 도시건설과 살림집 건축 에도 “민족적 형식과 사회주의적 내용”이라는 새로운 모색이 나타났다.

특히 소련에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에 발전한 표준주택을 모방한 북한은 조립식 공법을 통해 ‘평양속도’를 창조하며 빠르게 평양 복구에 성공했다. 북한에서 조립식 건축의 역사는 19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 독일, 폴란드 등 사회주의 국가의 기술자 원조와 함께, 소련 건축 아카데미에서 건축 교육을 받은 북한 유학생들의 귀국을 통해 소련의 조립식 건축 기술이 처음으로 북한에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시공 방식이 첫째, 규격화된 블록을 접합하여 연결하는 블록접합방식, 둘째, 정해진 규격의 패널을 부재별로 조립하여 연결하는 대형패널 조립방식, 셋째, 미리 조립한 통방 부재를 현장에서 연결하는 통방부재조립방식 등 크게 3가지로 발전했다

콘크리트 블록 조립방식, 대형 패널 조립 방식 등의 도입으로 주거 건축의 공업화 비율은 1957년 32.4%에 불과했지만 연간 약 10%씩 급속하게 상승해 1962년에는 그 비율이 70%를 넘었다. 이 같은 표준화된 조립식 공법 도입은 당시 미숙련 대중을 동원하여 건설하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불과 5-6년 전만 해도 폭격으로 거의 폐허상태였던 평양은 고층살림집이 가득한 현대도시로 변모했다. 다만 건설 속도와 성과에 치우치다보니 부실공사가 문제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이후 평양의 건설을 대변하는 말은 속도와 실용, 그리고 ‘현대적 조선식’ 건축양식이었다. 현대 조선식건물양식은 한 건물에 여러 가지 기능을 담으면서 몸체의 용적을 다양하게 결합 하고 그 위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조선식 지붕을 다양하게 씌우고 강철과 콘크리트 구조로 짓는 방식을 일컬었다. 특히 1960년에 ‘현대적인 조선식’ 건축의 본보기로 옥류관과 평양대극장이 완공됐다. 평양대극장의 건축과 관련해 「로동신문」(1960.8.12.)은 “우리의 젊은 설계 일군들이 대극장을 서양식으로 지으라고 할 때 우리 당은 서양식으로가 아니라, 조선식으로 지으라고 방향을 주고 그들을 고무하였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인민문화궁전(1974), 국제친선전람관(1978), 인민대학습당(1982) 등의 건설로 이어졌다.

[그림 3.] 평양의 건설자들이 1950년대 후반 조립식공법을 도입해 건물을 짓고 있다.

1970-80년대에
2차 변모

1970-80년대는 북한이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평양에 기념비적인 건물이 가장 많이 건축된 시기이다. 특히 1980년대 천리마거리 1단계공사에서는 처음으로 거리 주변에 중·고층 이상의 살림집(아파트)이 조성됐다. 당시 평양에 고층 살림집이 많이 도입된 이유는 평양으로의 인구 유입 때문만이 아니라 고층 살림집이 주요 도로의 가로 경관을 향상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은 건축을 일종의 예술로 표현하며, 이를 상징적인 건축물뿐만 아니라 고층살림집 건축에도 반영했다. 이 시기에 들어와 북한에서도 고층 살림집이 남한의 아파트와 유사하게 도시 주거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도시 및 주거단지 계획에서는 다양성과 입체성이 강조됐다. 다양성은 주로 외관상 뚜렷하게 드러나는 비반복적 형태로 나타났고, 입체성은 주거 건물의 고층화, 대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기 평양 살림집의 층수는 6~8층 정도였으나, 1975년 락원거리 20층, 1980~1985년 창광거리 25층과 30층, 경흥거리 40층과 41층, 1985~1992년 광복거리 42층 등으로 1970년대 이후 계속해서 높아졌다. 특히 북한은 1980년대 후반부터 광복거리를 조성하면서 건물들 사이에 높이차를 만들고 서로 어긋나게 만드는 배치를 통해 도시 경관에 다양성과 입체성을 주고자 시도했다.

[그림 4.] 김일성광장 뒤쪽에 세워진 인민대학습당에서 바라다 본 승리거리와 대동강 건너편 동평양의 2000년대 중반 모습.

그러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경제난을 겪으면서 평양에도 10년 이상 주택보급이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거리 조성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은 새롭게 평양시 정비사업에 나섰다. 이전에 개발된 거리의 개선 및 현대화 사업, 상하수도 건설과 도시미화사업이 병행해 이뤄졌다. 영광거리, 창광거리 현대화사업을 시작으로 평양대극장, 광복백화점 등 주요 상징건물의 리모델링이 속속 이뤄지고, 살림집 10만호 건설계획도 발표했다. 북한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연평균 2만 세대 건설을 목표로 제시하였으나 이후 계획이 수정되었고, 계획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동평양의 대동강변에 상업거리 조성계획도 발표됐지만 실제 추진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림 5.] 2009년 완공된 평양 만수대거리 살림집 전경.

2012년 김정은체제 출범 후 이 같은 계획은 ‘사회주의 문명국가’ 건설을 표방하며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특히 북한은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구호로 내세우며 주민들의 실생활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선 부족한 주택 보급과 물자 공급망 확장에 나섰다. 이에 따라 평양의 경우 창전거리, 은하과학자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려명거리 등이 순차적으로 조성되면서 고층아파트단지가 들었다. 지방도시와 군의 재정상황에 따라 차이가 확연하지만 신의주, 함흥, 청진 등 주요 대도시를 비롯해 일부 군(郡)지역에도 아파트와 살림집들이 건설되고 있다.

[표 1] 시기별로 조성된 평양의 주요 거리와 건축물

[그림 6] 평양 쑥섬의 과학기술전당과 대동강가에 들어선 미래과학자거리 전경.

또한 새로 조성된 거리에는 상업유통망을 확충해 국영상점에 없는 상품들을 주민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광복 거리에 문을 연 대형슈퍼마켓을 비롯해 황금벌상점 등 전문상점, 체인점 등이 새롭게 들어섰다. 그리고 고아, 노년층 등 취약 계층의 생활개선에 예산을 투입했다. 평양에 양로원, 고아원(육아원과 애육원)이 새로 건설되고, 이를 모델로 지방에도 양로원과 고아원이 속속 신설됐다. 주민 편의시설과 놀이시설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그러나 평양의 중심부를 벗어나면 여전히 노후 주택들이 즐비한 상황이다. 지방 도시들은 재개발계획만 세워놓고 실제 건설은 예산부족으로 더디기만 하다. 북한은 ‘자강력제일주의’를 표방하고 ‘대동강특구’와 삼지연시, 원산갈마지구 공사 등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면서 해외자본 유치를 꾀하고 있지만 경제제재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고 갈 길이 먼 것이다.

다만 긍정적인 것은 북한이 ‘사회주의문명국가’, ‘인민대중제일주의’ 구호를 통해 평양 도시개발의 우선순위가 주민들의 삶 개선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인민을 보살피는 국가, ‘어머니 당’이라는 이미지를 쌓고, 정권과 체제를 안정화 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 그칠지 북한 주민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지는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다.

남과 북이 교류를 확대해 도시재생과 인프라 건설을 함께 고민하고,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전반적인 국토개발사업에서 시행 착오를 줄이며 한반도 미래를 함께 구상하는 날이 다가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