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궁금한 북한의 이모저모

평양의 도시 건설 역사북한 대규모 건설은 언제나 돌격대의 몫
-평양 1만호 건설에도 군인과 청년돌격대 투입-

정창현 소장
머니투데이 평화경제연구소

폭염 속에서도 지난 3월 착공식을 가진 평양 사동구역 송신·송화지구 1만 세대 건설사업은 속도를 내고 있다.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건설에 투입된 인민군 부대와 청년돌격대원들이 ‘우리’라는 구호 아래 총진군에 나섰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1만 세대 주택건설의 주체는 군인과 청년돌격대원들이다.
북한에도 국가계획에 따라 공공건설을 지도하는 수도건설총국, 도(道)건설총국 등이 직할시와 각 도에 별도로 편성되어 있고, 그 산하에 실제 건설을 담당하는 건설여단이나 건설사업소가 각 지역별로, 기업별로 조직되어 있다. 각 건설사업소에는 건축, 전기, 기계 등의 기술자와 기능공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중앙부처인 인민봉사총국, 문화성, 철도성, 사회안전성 등 다른 부서에 비해 건설대상이 많거나 군대식 편제를 갖는 부서들도 별도로 건설연대나 건설총국을 조직해 운영한다. 물론 군대 안에는 공병대에 해당하는 건설사단(인민무력성 군사건설국 산하)이 편제되어 있다.

이러한 건설 지도와 시행조직은 소속 중앙부처나 도·시가 담당해야 하는 기반시설 공사, 주택건설 등을 맡아 시행한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인민봉사총국이 식당이나 봉사시설 건축을, 문화성이 사적관 등의 조성을, 철도성이 역사와 철도건설을, 군대가 군 관련 시설을 짓기 위해 건설연대나 건설사단을 편제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각 도·시·군의 일상적인 건설사업의 경우에는 각 단위마다 주택건설사업소, 공공건물건설사업소 등 세분화된 건설사업소 등이 맡아 한다.
그러나 중앙부처 산하의 건설단위나 지방부처 산하의 건설단위에서 독자적으로 할 수 없는 대규모 사업(댐, 도로, 물길공사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특별히 계획된 건설사업의 경우에는 각 기관, 각 도, 직장별 단위에서 참여하는 연합조직으로 ‘건설돌격대’를 구성해 사업을 진행해왔다. 중앙 차원뿐만 아니라 각 도나 군 차원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돌격대가 운영된다. 돌격대는 규모에 따라 사단-여단-연대-대대 등 군대식으로 편제되고, 통상 돌격대의 급여와 각종 지원물자는 해당 지역 및 기업소에서 부담한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2012년에 완공한 창전거리 건설에는 군인 건설사단, 인민보안부(현 사회안전성) 건설여단, 청년동맹 건설연대 청년돌격대 등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청년돌격대를 조직해 청년동맹이 주축이 되어 특정대상을 맡아 건설하는 경우도 흔히 있어 왔다. 이럴 경우 ‘청년영웅도로’, ‘청년발전소’ 등의 이름이 붙는다.

[그림 1] 1950년대 중반 전후 복구시기에 평양 건설에 참여한 청년돌격대의 공사 모습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건설형태는 북한에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 큰 비만 내리면 범람하는 보통강을 개수(改修)하는 공사였다. 일제 말기에도 보통강 개수공사가 시도됐지만 완료하지 못한 바 있다. 북한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후 3개월이 지난 5월에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던 김일성이 첫 삽을 뜨는 것으로 보통강 개수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는 새 수로를 건설하는 1단계사업과 제방을 높이고 준설 작업을 하는 2단계사업으로 나눠져 2개월여에 걸쳐 진행됐다. 새 수로를 조성하고, 약 2km에 달하는 강의 양쪽을 다진 뒤 강바닥을 깊이 파내는 공사가 밤낮없이 진행된 공사에 연인원 57만 9,328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평양 시민이 1인당 평균 2회를 참여할 때 가능한 숫자였다. 평양시민 거의 대부분이 ‘돌격대’가 되어 이 공사에 참여한 셈이다.

이러한 집단적 참여 내지 동원의 경험은 3년간의 6·25전쟁으로 파괴된 기반시설과 도시들을 건설하는데 그대로 적용됐다. 발전소와 저수지, 철도 등 기반시설이 거의 파괴되고,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평양을 비롯한 국토 재건설사업은 모두가 참여하거나 동원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모든 ‘인민’이 재건설사업에 참가하고, 모두가 함께 생산하며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1950년∼1960년대 북한을 상징하는 천리마운동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탄생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영웅’을 배출했다. 그리고 흔히 ‘집단적 동원체제’라고 규정되는 이러한 형태의 대규모 건설사업은 1980년대 평양시 주택건설사업과 남포갑문공사, 1990년대 평양-남포간 ‘청년영웅도로’ 건설, 2010년대 창전거리와 미래과학자거리 건설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최악의 경제난 때는 군대와 청년돌격대가 동원된 건설사업이 두드러졌다.

건설장비가 부족하고, 보급이 열악한 상황에서 진행된 집단적 건설사업에는 ‘피눈물’이 수반된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고, 고생 뒤의 ‘추억’이 회고담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2000년대에 평양을 여러 번 방문했을 때 곳곳의 현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06년 3월 하루는 광복거리 아파트 단지를 지나는데, 옆에 있던 안내원이 자랑스럽게 “저기 살림집(아파트)이 보이지요. 저거 내가 지은 거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
2007년 4월 평양 시내를 벗어나 남포로 가는 10차선 고속도로(‘청년영웅도로’)를 달리는데 안내원이 잠시 밖을 보라고 하더니 “저기부터 내가 건설한 거요. 그때 고생 좀 했지”라고 말했다. 1998년 처음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을 때 청년돌격대로 참여했다고 한다.
2008년 5월 호텔 여성봉사원에게 “얼굴이 많이 탔다”고 하니 “얼마 전에 한 달간 건설현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공사현장에서 무슨 일을 했냐”고 재차 물으니 “고생하는 돌격대 청년들에게 밥도 해주고, 이것저것 허드렛일도 했다”고 한다. “아니 호텔 봉사원이 그런 일까지 해야 하냐”고 하니 “모두가 다 한마음으로 떨쳐나서고 있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할 수 있는 일을 해 야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림 2] 2011년 창전거리 아파트 건설 현장 모습

지난해 9월 북한은 대규모 홍수와 태풍피해가 발생하자 평양의 당원으로 2개의 ‘수도당원사단’을 편성해 피해복구 현장에 투입했다. 북한 보도에 따르면 돌격대처럼 구성된 수도당원사단은 주택과 공공건물 건설 등 실질적인 수해복구 작업에 투입할 인력이라며, 군부대에서 전문건설을 맡았던 전역자들을 주축으로 편성됐다. 5년∼10년 동안 군사복무하면서 군부대가 동원된 다양한 건설사업에서 경험을 쌓거나 청년돌격대로 참여한 경험을 살려 전역 후에도 건설사단(여단)이나 돌격대에 참여, 동원되는 생활이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다양한 조직이 합동으로 건설사업을, 그것도 ‘속도전’으로 진행되는 북한의 건설사업에 대해서는 항상 부실우려가 제기돼 왔다. 실제로 2014년 5월에는 평양 평천구역에서 건설 중이던 23층 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1년 창전거리 아파트공사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건설 중인 외벽에 “더 높이 더 빨리”란 현수막과 함께 “천년책임 만년보장”이란 현수막이 동시에 걸려 있었다. 건설 속도와 질적 담보를 모두 강조한 것인데, 실제로 그렇게 됐는지는 불확실하다. 당시 이틀에 한 층씩 올라가는 골조공사 속도로 붕괴 우려까지 나왔다. 더구나 이 공사에는 평양기계대학 등 비숙련공인 대학생들이 휴교까지 하면서 청년돌격대로 많이 동원됐다. 물론 당시에도 “북한 당국이 45층 규모의 고층 아파트를 석 달 만에 골조공사를 완공한 것은 국내 공법처럼 콘크리트 타설이 아닌 외벽과 슬라브 등을 외부에서 제작해 조립하는 PC공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그림 3] 2013년 평양 만수대의사당과 만수대예술극장 사이에 건설 계획된 만수대분수화초공원 조감도

2000년대 중반 함께 방북했던 건설전문가는 “북은 남쪽보다 통상 골조공사 때 적어도 50%정도 더 콘크리트나 자갈을 더 넣는 것 같다”며 “붕괴 위험은 높일 수 있지만 자재활용이 비효율적이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평양 1만 세대) 살림집 건설장에서 창조된 ‘기적적인 건설 속도’는 선진적인 건축 기술과 공법이나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매일 연 천여 명의 수도시민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건설장에 달려 나온다”고 퇴근 뒤 건설장으로 달려 나와 새벽까지 일하는 봉사자들의 ‘선행’을 보도하고 있다.
해방 후부터 정착된 역사적 연원이 있지만 이런 방식의 건설조직과 속도전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북한의 지적처럼 자본주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216사단’이 진행하고 있는 백두산 삼지연시 3단계 건설사업은 올해로 마무리될 전망이다. 매년 1만 세대를 평양시에 지을 건설계획은 총력전을 펼쳐 첫 해인 올해 어떻게든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제재와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 속에서 내년에도 목표 달성이 가능할지 궁금하다.